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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地籍圖와 봄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地籍圖와 봄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미디어
  • 입력 2024.02.2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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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籍圖와 봄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숨만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복잡스럽고 번거로움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왜 내가 해야 하지?”

어딘가로 가서 숨어있거나 사막의 모래알처럼 누워있거나 하는 흐물흐물 하는 연체동물 같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형체만 남은 화석 같은 나날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죽은 자의 영혼이 내 주위를 맴도는 그런 날이 뿌연 영상으로 다가온다. 자주 보는 사람들도 서먹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살아가는 것이 힘겹고 모래 위를 걷는 휘청거림과 이글거리는 태양이 물기를 말라가게 하는 곳이 내가 서있는 곳이라고 생각이 들 때 거기가 어디일까. 종이 위의 땅 모양, 지적도(地籍圖). 땅 번지와 까만 선으로 그러진 여러 형체의 갇혀진 모양. 숨통을 트일 만한 곳이 없는 선과 선이 이어진 곳, 소유자가 꼭 있는 곳. 

오늘은 비가 내리다가 눈이 펑펑 쏟아진다. 눈 구경을 하면 나도 하얗게 된 듯 마음이 맑아진다. 사각거리며 눈 위를 걷는 발걸음 소리도 그립다. 비가 내린 후의 눈 내림은 녹아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우수(雨水)는 눈이나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즉 곧 날씨가 풀리고 비가 내리고 땅속의 부지런한 뿌리나 씨앗들이 땅 위로 올라올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수는 빗물이구나.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하고 한파와 냉기를 녹아내리게 하며 봄을 알리는 것이다.

세월이 가둬두었던 모든 것, 일, 기억 잊기를 해야 한다고 수없이 마음과 약속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겨울이 녹아내리면서 내 마음은 아직도 얼어있다. 언제 녹을지 나도 모른다. 젊은 날 종이 위에 지번을 적고 지가를 매기면서 나는 일찍이 나무를 키웠었다. 땅의 경계에 흐르는 냇물과 계곡은 맑고 고운 소리를 내었다. 

지적도 종이 위에 도시가 생기면서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식물이 살고 수많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음을 볼 때 사람의 팔자가 있듯이 땅들도 운명이 있는 건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논, 밭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살기 좋은 마을이 멋지게 시선을 끄는 땅이 있는가 하면 도랑과 구거와 습지가 있다. 자연에도 이치에 맞게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지적도와 지도는 차이가 있다. 나는 정확하고 지번이 확실한 지적도를 좋아한다. 종이의 평면 위에 꿈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땅값이 오르고 사람들이 몰려와 살아간다 해도 한 장의 지적도만 보면 뛰어놀던 곳이 여기구나, 여기는 언덕이었어! 어렴풋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백지 같던 마음에 빗물이 흘러가고 풀이 자라고 꽃이 핀다.

마당에 모여든 햇볕이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서먹했던 인간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면서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하는 시기도 봄이 오면서부터다. 닫아두었던 대문을 조금씩 열어두기 시작하고 봄바람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그사이에 꽃샘추위가 왔다가 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종이 위에 새겨진 경계가 더 튼튼해지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한다. 드높은 산이 평지가 되어 또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좋은 환경으로 함께 살았던 정들이 따라가고 따라오는 봄바람은 아닐까.

사람이 사는 곳이면 지적도는 경계가 수도 없이 변화한다. 영원히 묶여있던 땅들도 새싹이 돋아나듯 서서히 도면이 달라진다.

사흘째 내리고 있는 비로 경직되고 굳어버리고 얼어버렸던 마음과 몸이 풀어져 너그러워졌다. 닫아걸었던 마음의 문도 열리고 있다.

그랬구나. 내가 좋아하는 지적도 위를 흐르는 마음이 출렁이고 겨울에 얼었던 땅들이 눈물처럼 흐르고 있다.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다면 당신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따뜻한 손으로 마음을 열어놓고 가슴속 감추어져 있던 말 못할 사연들을 큰소리로 소리치듯 풀어놓고 싶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이 풀리듯 지적도 위에도 맑은 봄비가 마음을 적시며 봄을 기다리며 마음을 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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