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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벼락을 맞으면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수필] 벼락을 맞으면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미디어
  • 입력 2023.12.2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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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벼락을 맞으면

눈이 내렸다. 차를 마시는 마음처럼 첫눈은 경주에 있어서 못 보았지만 오늘 아침 소복이 쌓인 눈을 만져보았다. 온몸으로 차가움보다는 반가운 추억처럼 스스로 녹아 손을 적셔주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의 진실 같은 하얀 마음의 눈이었다. 세상은 이렇듯 하얗고 눈부신 정이 스며드는 차 맛 같았다.

얼마 전 갯벌을 갔었다. 날씨는 포근하고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 길을 따라 걸었다. 갑자기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해무(海霧)로 변하여 한 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가 가는 길 앞에 버티고 서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늘 가보고 싶었던 섬이라 어렵게 시간을 내어 보러왔는데 하늘이 우리를 기다렸는지 구름도 내려오는 듯했다. 뒤돌아갈까 하다가 설마 섬까지는 갈 수 있겠다 싶어 우산을 펼쳐 들고 섬으로 향했다. 두꺼운 안개 저 멀리에 거무스름하게 섬이 보였다. 해상 풍력발전기는 하얀 안개 속에서 내 눈 안에 모두 담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의 날개들만이 두꺼운 안개에 잠겨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잠잠하던 갯벌이 술렁이듯 굵은 비가 쏟아지더니 광활한 갯벌에 꽃을 피우듯 바람이 일며 안개가 더 많이 피어났다. 은근히 겁이 나서 돌아나가자고 일행에게 소리를 쳤다. 

그때 “딱”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가 번쩍하고 하늘을 갈라놓은 듯 지나갔다. 나는 무서움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 큰소리에 날아갈 듯 한쪽으로 몸이 쏠렸다. 우산을 놓치고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온 듯한 멍하고 무감각해졌다. 앞서가던 일행이 달려와 괜찮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못하게 두려웠다. 여름에 천둥소리만 들어도 무섭고 겁이 나는데 겨울의 천둥소리와 하늘에 그어지는 번쩍이는 번갯빛은 심장을 멎게 하는 것 같았다. 그중 한 분이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그때야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분은 머리가 찌릿찌릿한 게 몸을 지나갔다고 했다. 그래도 직접 벼락을 맞은 사람은 없었지만 공포심에 정신들이 나간 듯했다.

젖은 옷에 추워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카페의 창문 밖 갯벌과 안개가 아득하게 보였다.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차나 마실 걸 섬에는 왜 간다고 해서 벼락을 맞았는지 모르겠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생사를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각자의 놀란 마음을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벼락을 제일 많이 맞은 분은 당연히 벼락을 맞을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름에 철자가 들어있어 벼락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나는 우산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 한 분은 대머리라 피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벼락을 맞으면 후유증이 온다는데 두통, 심장병, 기억상실, 화상 등 많은 증상이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증상이 오는데 사람의 운명도 알아내는 신비한 능력도 생긴다고 하지만 이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몸으로 전기가 살짝 지나갔다고 해도 벼락을 맞은 것은 사실이라며 치료를 받아야 할지 말지 또 언쟁하기 시작했다. 서로 자신이 벼락을 많이 맞았다고 자랑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꼭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이 지난 후 동네 분들을 만났는데 “벼락 맞았다며? 증상은 어때?”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등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벼락을 제일 많이 맞았다는 거였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그때 생각을 하면 아이들처럼 철없이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넓고도 넓은 바닷가 갯벌의 일은 한낱 하루의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자연이 주는 신비한 풍경은 지금도 너무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살다보면 고난도 겪고 또 극복하는 힘도 생긴다. 모든 행복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한잔의 차를 눈이 내리는 속도로 마시다보면 시간은 더 빨리 흐르는 것이다. 느슨하게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면 어느새 눈은 그치고 먼 훗날 가우디의 자연주의와 장인정신이 담겨있는 구엘 공원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벼락을 맞은 것은 내 생의 꿈을 키우는 눈부신 삶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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