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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쓴맛/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수필] 쓴맛/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10.16 15:06
  • 수정 2023.10.1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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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쓴맛

올해의 무더위가 활시위를 떠나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밭의 작물들도 누렇게 물들고 벼들은 탈곡을 기다리고 있다. 버석거리는 오이 넝쿨을 걷다가 늙은 오이가 달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생했네. 여태 여기에 있었네. 중얼거리며 넝쿨을 들어 올리다가 다시 놓아주고 못 본 척하고 돌아 나왔다.

한여름, 열무김치와 늙은 오이생채를 넣고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밥을 비벼 먹으면 입맛이 돌며 너무 맛이 있었다. 날이 너무 더워 더위를 먹었는지 힘도 없고 땀이 많이 흘렀다. 그래도 맛있는 비빔밥을 먹으면 나도 모르게 배도 부르면서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원래 비빔밥을 좋아했다. 간편하고 빨리 먹고 먹기 싫은 반찬도 넣어서 비벼 먹으면 맛이 좋아졌다. 직장 다닐 때 매일 점심때면 비빔밥 멤버가 되어버린 직원끼리 큰 그릇에 이것저것 다 넣고 쓱쓱 비벼서 나눠 먹었다. 심각하게 바라보던 남자 직원이 말했다. “매일 비벼 먹으니 딸만 낳았지”, 밥을 먹으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그런 게 있어” 한다. 그 남자 직원도 딸만 둘이 있다. “드시고 싶으면 이리 오셔요”하면 “됐어”하고 휭하니 식당을 나가버렸다.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눈으로 깔깔대며 웃었다. 비빔밥을 먹는 모두는 딸만 낳은 딸 엄마들이었다. 비빔밥과 딸과 무슨 관계가 있든 말든 딸 엄마들은 늘 비벼서 밥을 맛있게 먹었다.

저녁 반찬 걱정을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게 동생이 늙은 오이와 상추, 풋고추를 가지고 왔다. 늙은 오이를 보니 군침이 돌았다. 동생이 돌아가자마자 늙은 오이의 껍질을 벗기고 절이고 풋고추, 고추장, 고춧가루, 마늘 등 양념을 넣고 늙은 오이생채를 만들었다. 날씨도 더운데 너무 잘됐다하고는 늙은 오이생채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던 늙은 오이생채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식구들을 기다렸다.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면서. 신이 난 나는 비벼 먹으라고 했더니 싫다며 엄마나 비벼 드시라고 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도 밥에 늙은 오이생채만 넣고 비벼서 맛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한 숟가락을 먹는 순간, 그렇게 정성을 들인 늙은 오이생채에서 쓴맛이 강하게 입안을 자극했다. 

옆에서 누군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던 늙은 오이생채가 왜 이리 써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만은 그 맛있게 먹던 생각이 떠오르며 아쉬움이 찾아왔다.

자꾸만 생각나는 그 쓴맛을 잊어 갈 때쯤 추석이 다가왔다. 미리 부모님 성묘를 갔다 오는 것이 편하여 큰 오라버니 배밭으로 갔다. 마침 큰 오라버니가 내려와 계셨다. 성묘를 마치고 우리 형제가 둘러앉아 배를 깎아 먹으며 “올해는 배가 더 맛있네”, 과즙도 많고 사각거리는 것이 목이 말라 물을 먹는 것보다 시원했다. 그때 돌아앉아 고개를 숙이고 계셨던 큰 오라버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힘에 부쳐서 과수원을 임대하기로 했으며 올해가 마지막으로 배밭에서 배를 먹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아무도 말을 못하고 각자의 추억에 설움 같은 것이 배어 나와서인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팔순의 큰 오라버니가 과수원을 가꾸기에는 무리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기 때문이었다. 형제 중 누구라도 내가 과수원 농사를 짓겠다고 나서지도 못했다. 부모님이 일구신 그 많은 배나무와 배꽃과 배나무 그늘, 하늘을 가릴 만큼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배를 이제 볼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다는 생각에 모두는 펑펑 울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어느새 7년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고 이제 고향을 잊어야 한다는 서운함만이 배나무 가지 사이를 추억이 되어 흘러 다녔다.

늙은 오이 껍질처럼 거칠어진 배나무를 끌어 앉았다. 이제 너를 못 보겠구나. 그동안 마음의 안식처 같았던 과수원이고 배나무들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이별의 통보에 늘 고향 생각만을 해야 하는구나. 다리에 힘이 빠지고 가슴이 텅텅 비어갔다. 큰 오라버니는 배를 골고루 챙겨서 차에 실어주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그렇다고 고향이 어디 가겠나. 쓸쓸히 차에 오르는 동생들을 굽은 허리를 세우며 배웅을 해주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에 가려 멀어지는 배밭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잘 있거라. 너희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거라. 늙은 오이의 쓴맛보다 더 쓴맛이 입안에 고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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