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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에게 속다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나에게 속다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06.2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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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나에게 속다

성철스님께서는 삼천 배를 올려야 만나주셨다고 한다. 삼천 배에 막혀 만나지 못하고 그냥 가버린 중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스님께서 삼천 배를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은 만나러 오시는 신도님들이 너무 많았고 삼천 배를 해도 복 받아가는 그것이 아니니 자신들부터 낮추라는 것이고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뜻에서 삼천 배를 하시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본다. 

성철스님이 떠오른 것은 나도 착각을 잘하고 위급한 일이 일어나면 대처를 못하고 갈팡질팡하기 때문이다. 순간의 선택이나 행동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손녀 봐주고 밭일하고 이일저일 갈 곳도 많고 날짜와 요일을 헷갈리거나 모르는 날이 많은 나로서는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가 정신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피곤이 밀려왔다. 외손녀를 봐주고 점심때쯤 돌아와 쓰러지듯 잠을 잤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탁상용 시계가 여섯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정신력은 얽히고설켰다. 잠을 깜짝 놀라서 깼는데 저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창문에서 어렴풋이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아주 조용했다. 문득 약속이 생각났다. 오전 9시쯤에 만나는 선약을 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녁 6시라면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인데 기다리다가 모두 가버린 것이 된 것이다. 너무 황당하고 정신이 없어 지인께 문자를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은 시간이 안 되어 내일 가겠으니 그리 아시라고. 친절하시게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장이 왔다. 그때야 안심을 하고 침대에서 창문을 보니 어렴풋이 저녁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점점 날이 밝아지는 게 아닌가. 벌떡 일어나서 나와 보니 아침인 것이다 새벽 여섯 시. 아 이걸 어쩌나 새벽에 못 간다고 문자를 보내고 난리를 친 것이다. 핸드폰 날짜와 시간을 보니 정말 저녁이 아니고 아침이었다. 그렇다면 몇 시간을 잔 것인가. 전날 점심부터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새벽까지 죽은 듯 잠을 잔 것이 아닌가.

멍하니 길에 서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한참을 생각한다. 특히 갑자기 가야 할 곳이 떠올랐을 때 이리저리 집안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일으킬 듯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고 수도 없이 시계를 보면서 현관문을 나설 때가 문제가 된다. 그 순간은 다 잊어버리고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만 생각해서 현관문을 열고 뛰듯 나오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엘리베이터가 서고 문이 열리면 아무 생각 없이 훌쩍 사람들을 따라 내리기도 한다. 한 곳만이 생각났기 때문에 또 무엇인가를 두고 나온다. 손과 합체가 되는 핸드폰이다. 또다시 뛰어서 집으로 가면 식탁 위에 있거나 탁자 위에 있다. 아무리 찾아도 없을 때는 가방 안에서 벨소리가 난다. 누군가 전화를 한 것이다. 요란스럽고 정신없는 외출의 시작을 누구에게 말한다는 것은 너무 창피해서 비밀로 해두고 있다. 

슬픈 마음이 밀려와 목사로 계시는 지인께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며 댓바람에 문자를 받으신 분은 얼마나 놀랐을까 등 상담하듯 하소연을 하였다. 미안해서 그분을 어찌 볼 수 있느냐고 마음이 떨려서 안정이 안 된다고 했다. 웃으시며 지금은 아침이고 약속을 다시 하고 만나면 되고 사람의 뇌는 착각을 잘한다고 하셨다.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여주셨다. 

이러다 오해만 받으면 어쩌나 염려도 되고 성급한 마음도 한 번쯤은 생각해보면서 일상을 즐겁고 기쁘게 보내야 되지 않을까. 성인들께선 정신력이 강하고 하고자 하는 일에 믿음을 가지고 자신감 있게 사시다가 좋은 말씀, 언행의 일치로 우리 필부들을 편안한 세상에 머물게 해주시는가보다. 

“내 말에 속지 말란 말여. 내 말 하는데 속지 마라. 나는 그짓말만 하는 사람이니, 자기 말에 속는 것이 아니고 내 말에 속지 마라” 인터뷰를 잘 안 하시는 성철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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