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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대나무 도마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대나무 도마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06.1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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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대나무 도마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았다. 대나무로 만든 튼튼하고 매끄러우면서 모양도 맘에 드는 칼도마였다. 얼떨결에 받았는데 아마도 그분은 여행을 가셨다가 기념품으로 사 오신 것 같았다. 놀라운 것은 그분과는 친분도 없고 가끔씩 마주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대나무로 도마를 만든다는 것이 지금도 생소하다.

대나무 도마는 포장지도 그대로인 채 주방 한쪽에 잘 놓여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나에게 온 도마가 또 다른 사람에게 간다는 것은 선물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가볍고 모양도 예쁘고 다시 보니 만든 이의 마음이 배어있고 정성이 깃들어 있는 고급 도마인 것 같았다. 

옛날 부엌의 도마는 크고 투박하고 통나무를 잘라다놓은 것 같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토막 같았다. 부엌 한구석에 고정으로 놓여있었고 작은 도마 역시 지금처럼 매끄럽고 번듯하지 않았다. 도마 가운데는 움푹 들어가 있고 칼자국이 선명했다. 

새벽 창호지 문조차도 검게 보이는 어두컴컴한 그 시각 잠결에 들리는 도마 소리는 아득하기도 하고 잠을 깨우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늦잠을 자게 되어 또 지각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 직전이면 일어나라는 엄마의 나직한 소리를 듣고는 미안해야 했던 기억. 아침밥 짓는데 도와드리지 못하고 맨날 간신히 일어나 도시락만 받아들고 학교가기에 바빴다. 그 고달픈 부엌일이 그리워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도시락을 싸지 않으면 늙었다는 증거라고 어머니들이 말했지만 지금은 도시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대가 되었다. 식판 시대라고 하면 될까. 

희미한 불빛 아래서 반듯하게 무를 썰고 배추김치를 썰고 도시락 반찬을 만드셨다. 그리고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등잔불과 남포등, 아궁이의 희미한 불빛으로 부엌일을 하는 엄마는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푸셨고 어떻게든 맛있는 도시락 반찬을 만들어 담아주셨다. 고마운 것도 모르고 도시 아이들이 싸오는 식빵에 계란을 부쳐서 샌드위치처럼 만든 식빵을 먹는 것을 부러워했으니까. 

중학교 가정 실습 시간에 처음 만들어본 샌드위치는 비위에 맞지 않아 먹지는 못했다. 처음 만든 마요네즈의 새콤하고 느끼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기억한다. 양배추와 양파를 써는데 눈물이 흐르고 처음으로 도마에 칼을 사용하는 것을 배웠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솥뚜껑 운전 수십 년이지만 아직도 서툴고 채소 썰기는 손이 벨까봐 겁이 난다. 식탁에 둘러앉아 고르지 못한 채소볶음을 맛있다고 먹어주는 식구들이 한없이 고맙다. 고른 도마 소리를 낼 줄도 모르는,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써는 솜씨는 아니더라도 비슷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새벽의 도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 자식들이지만 그 포근하고 따뜻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들려주고 싶다. 함석지붕 위에 쏟아지는 빗소리 같은 도마 소리와 구수하고 아궁이의 불처럼 따뜻한 된장찌개의 맛이 아련하다.

수도 없이 이어지는 칼질에 엄마의 고운 손마디는 굵어가고 어깨는 기울어졌을 것이다. 그 시절의 도마 소리와 단단하고 멋진 새 대나무 도마의 소리는 어떤 소리를 낼까. 새 대나무 도마 위에 가족의 건강을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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