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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산소와 넝쿨장미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산소와 넝쿨장미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05.2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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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산소와 넝쿨장미

어제는 한여름 무더위 같더니만 오늘 아침은 구름이 많고 흐린 날씨다. 우산을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별걱정을 다하며 집을 나섰다. 

볼일을 잠깐 보고 돌아오는데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고새를 못 참고 비가 오는 거야 하며 투덜거리며 뛰듯 걸었다. 집에 거의 다오니 소나기처럼 쏟아 부었다. 옷이 반쯤 젖고 사가지고 온 물건을 가슴에 품고 아파트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머리는 비에 젖어 달라붙었고 가방을 들여다보니 다행히 가방 속은 멀쩡했다.

괜히 속이 상했다. 주로 다니는 길가의 넝쿨장미꽃도 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싶었었다. 비만 내리지 않았다면. 오랜만에 시간적 여유를 천천히 누리고 싶었는데 한 치 앞도 모른다니 그 꼴이 되고 말았다.

늘 다니는 길가에, 그것도 아파트 단지 옆에 산소가 있는 것을 오래전부터, 아니 이사 오면서부터 보았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가깝게 바라보였다. 어느 조상님이 이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시고 계시고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지 궁금했다. 이 동네 유지분이신가 하는 생각도 들고 돌아가셔서도 참 편안하시게 지내고 계신 행복하신 분 같았다.

늘 산소는 깨끗하게 풀이 깎여있고 도시 속의 숲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봄이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산소 주위를 향기롭게 했고 사월이면 개나리꽃, 오월이면 빨간 넝쿨장미가 피었다. 담장처럼 둘러친 담장 사이로 두 분의 봉분이 보이고 비석이 서있다. 

산소를 지나칠 때마다 마음이 가라앉으며 안정이 되고 우리 부모님 산소가 떠올랐다. 미소가 지어지고 추석 때쯤 벌초가 잘된 산소를 보면 우리 부모님 산소도 오빠들이 고생하며 벌초를 했겠구나 생각했다.

철망 펜스에 두 손을 잡고 한참을 산소를 바라다보다가 길을 가곤 한다. 복 많으신 누군가의 조상님인지 부럽기까지 했다. 몇 해가 지나고 산소의 자손을 알게 되었다. 반갑고 가까운 이웃 같았다. “조상님을 잘 모셔서 어려운 일없이 잘 사시나 봐요”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고 남들처럼 돌보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좋으시겠어요. 조상님을 늘 보셔서요”라고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눈 깜빡할 사이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셔서 수십 년 후 어머니의 장례식 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를 합장하였다. 엄마의 영구차가 도착하기 전 아버지의 이장 작업이 동네 친척과 동네 분들이 다 해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셨다. 산소도 이미 정해서 파놓은 상태였고 아버지의 신체를 처음 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란히 묻고 요즘 산소처럼 짧은 시간에 마무리가 되었다.

정성껏 제사상을 차리고 간단한 제사를 모신 뒤 장례 절차는 끝났다. 슬픈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이승과 저승에서 떨어져 계셨던 부모님을 한자리에 모시게 되면서부터 마음이 어딘가 모르게 아늑해지고 안심이 되었다. 서로를 그리워하신 부모님이 한 곳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 아버지 이제부터 두 분의 집이 지어졌네요. 친정으로 생각하고 자주 올 게요”하며 눈물을 삼켰다.

영원히 이별 없는 산소를 바라볼 때마다 미소를 지어가며 살아생전 못다 한 이야기들, 못다 한 서로를 그리워했을 그리고 기다렸을 세월을 내려놓고 행복하게 사시길 빌었다.

산소 앞을 지나치며 잠시 멈추지를 못하고 비를 피하며 뛰어오다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인사의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아늑하게 들렸다. 절정을 향하여 달려가는 아름다운 넝쿨장미가 산소 담장 펜스를 붙잡고 있지만 나를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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