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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보리밭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보리밭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05.0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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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보리밭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빗방울이 아니었다. 내가 버린 모든 것들이 어디엔가 끼어 있다가 섞여 내리는 듯 가라앉지 않은 뜨물 같은 비였다. 저런 비에 젖으면 씻어지지 않아 개운하지 않은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비는 언제나 깨끗하고 맑았었다. 잔설이 녹듯 꽃잎들이 젖어 길 위에 앉아있다.

항상 열려있는 대문을 지나 마당 끝 밭은 늘 보리를 심었다. 가을에 씨를 뿌리고 얼마 후면 잔디 같은 싹들이 파랗게 돋아났다. 보리는 억척스럽게 겨울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고 봄이 오면 쑥쑥 자라서 파닥거리며 보리 잎을 이리 뒤 척 저리 뒤척였다. 철없는 우리는 보리밭 고랑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파란 물이 가슴 가득 출렁였다. 

햇살은 눈부시고 밤의 별들은 영원히 빛났다. 그것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텅 빈 가슴에서 노래처럼 남아있다. 잊어버렸던 친구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도 보리밭의 추억이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노래를 신청하고 기다리던 청소년기에 가슴 울렁이듯 보리밭도 일렁였다.

두고 온 기억처럼 부산의 자갈치시장 뒤편에서 ‘보리밭 노래비’를 보았다. 뜻밖이었다. 바닷가 부둣가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뱃고동 소리 지나가는 구름 같은 곳에서 윤용하님과 박화목님을 뵈었다. 바다 속 물고기들은 떼를 지어 몰려 다녔다. 암울했던 시절을 모르는 물고기들은 활기차고 힘찼다. 숨 막히도록 뛰어가 숨 헐떡이며 바라본 자갈치시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맞이해주었다. 모든 것은 이렇듯 흘러 흘러 변하고 기억만이 그 자리에 있음을 알았다.

-‘보리밭’ 작곡 배경-

1952년 늦가을, 한국전쟁 중 부산 피난 시절 남포동(자갈치 일대)의 한 술자리에서 윤용하는 시인 박화목에게 말했다.

“박형, 발붙일 곳도 없고 황폐해진 젊은이들의 가슴에 꿈과 희망을 줄 수 있고 훈훈한 서정으로 부를 수 있는 가곡을 만드세.”

박화목은 이틀 후 ‘옛 생각’이라는 제목의 짧은 서정시를 지어 그에게 건넸고 며칠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윤용하는 ’보리밭’으로 제목을 바꾸어 악보를 내민다. 바로 가곡 보리밭의 탄생이었다. 가곡 보리밭은 소박한 가락과 시어로 서민적 애환을 담고 있어 독창은 물론 합창곡으로 편곡되어 오늘날까지 노인에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함께 부르는 국민 애창곡으로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있다. (보리밭 노래비 전문)

2009년 부산 자갈치시장에는 ‘보리밭’ 노래비가 세워졌고, 이를 앞둔 2009년 5월22일 ‘부산일보’에 “아버지의 가곡이 탄생한 부산에 노래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그래서 늘 기도했는데 드디어 응답이 온 것 같다”고 기뻐하는 딸 윤은희씨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여름이 문턱을 넘어오면 보리밭은 누렇게 물들기 시작한다. 파랗던 보리가 누렇게 익어갔다. 새들도 보리밭 위를 자유롭게 날며 노래를 불렀다. 깜부기를 뽑아 친구들 얼굴에 바르며 장난도 쳤다. 까슬거리는 보리 털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집에 와서 보면 보리 털에 찔려 다리와 팔이 벌겋게 부어 올라와 있어도 아프지도 않았다.

봄비 속으로 사라진 보리밭을 오래 생각했다. 가늘고 긴 잎새마다 오래된 시간이 물방울로 맺히고 반짝였다. 맑고 투명하고 새로웠던 봄비와 보리밭이 글썽이며 점점 다가오며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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