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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매달리다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매달리다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04.1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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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매달리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詩) ‘와락’을 읽다가 와락 달려드는 슬픔에 나는 울었다. 와락이 무엇인가, 나이 들면 못하는 젊음의 상징이 아닌가. 마지막 말도 못하고 끝나버린 첫사랑이 새싹처럼 땅을 밀고 올라오는 저녁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밤안개도 없는 저녁 별빛이 길을 열어주던 봄밤, 숨차게 뛰어가서 그대를 와락 껴안지 못한 것이 아직 미련으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둠 속에 사라지는 뒷모습을 나는 부끄러워 돌아보지도 못했다. 이게 첫사랑이고 첫사랑의 끝이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그대는 기억할까. 그날 밤을, 나를 바래다주던 그 봄밤을. 소식이 끊기고 나는 너무 슬퍼서 아무 생각도 못하고 방에서 나가지를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선배가 친하지도 않은데 말을 걸어왔다. 너 남자친구 참 잘 생겼더라. 나에게는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 되었다. 그날 우린 헤어졌으니까. 지금까지 마음속에서만 살아서 추억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까. 수십 년을 매달리다 떨어지는 낙엽이 되고 떨어지는 꽃잎이 되어 늙어가고 있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이기에 나는 기억한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말없이 떠난 그대를 나는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라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 몸 어디에서 힘이 생겨서 또 손을 뻗쳐 잡고 매달리던 그 많은 생각과 일들, 포도 덩굴손이 허공을 하늘거리며 매달릴 곳을 찾는 그 많은 손을 우리는 줄을 띄워주고 살며시 줄에 그 손을 얹어주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도와주며 살아갈 생명의 길을 잡게 해주고 누군가는 그 여린 손을 중세시대의 단두대 위로 끌어올려 ‘헉’ 잘라버린다.

이유가 있지. 다듬는다는 명분이 있지. 너무 많은 손을 단절시켜야 포도가 잘 자라고 열매가 크니까. 당연한 이 단절이 세월 속에서 당연하게 처참하지 않게 이루어지고 가을이 오면 수많은 열매가 녹슬고 낡아버린 생명줄에 온몸을 지탱하며 또 누군가를 기다리지.

사는 것이 돌고 도는 팔랑개비 같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반복되는 것은 싫다 소리쳤지만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나는 가늘고 인정 없는 생명줄에 매달리고 감는 습관으로 반복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몸부림치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여 매달리는 위대한 힘을 분홍빛으로 물드는 봄에 달콤하게 또 가슴이 뛰고 설레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와락’ 껴안을 봄을 사람들과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겠지. 숨이 막히도록. 꽃을 피울 것인가, 잎을 피울 것인가 자연의 섭리에 갈등하는 꽃나무들처럼 두 손에 힘을 주고 버티며 열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닐까.

옛사랑을 소녀시절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은 아픔이다. 잊혀진 나를 떠올려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픔이다. 

세월의 바람 속에서 버리지 못하고 너무 꼭 잡고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은 여전히 흔들리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c Effect)’인지도 모르겠다. 착각에서 착시로 이어지는 마지막 기억에 매달려 모두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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