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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언 배추김치 담기/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언 배추김치 담기/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03.0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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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언 배추김치 담기

가을에 배추 한 포기와 무 두 개를 베란다에 두어야 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김치냉장고에 넣고는 깜빡했다. 설마 얼지는 않겠지, 신문지에 싸고 비닐봉지에 넣었으니 상하지도 않고 싱싱할 거라는 생각으로 넣어둔 것 같다. 동네 분들과 이야기하다가 나박김치가 맛있다고 하는 말에 집에 와서 김치냉장고의 배추와 무를 꺼내보았다. 

배추는 곁줄기가 물컹 상했고 속은 꽁꽁 얼어있었다. 무는 풀어보지도 않고 꺼내놓았다. 녹으면 상태를 보자고. 다음날 녹았거니 하고 배추를 보니 그대로였고 무는 물이 줄줄 흐르고 비닐 같은 껍질이 녹은 것처럼 벗겨져 미끄덩거렸다. 이걸 어쩌나, 버리자니 아깝고 음식을 하자니 맛이 없을 테고 바라보고 있다가 김치냉장고를 뒤져보니 작년에 배추김치 담고 남은 속을 담아놓은 통이 보였다. 열어보니 먹을 만했다. 

예전에 봄이면 묻어두었던 배추나 무, 파 등을 구덩이를 파고 묻어두면 겨우내 꺼내먹고 봄이면 남은 채소들을 다 꺼낸 뒤 구덩이를 없애버렸다. 구덩이에서 무에 싹이라서 자라있기도 했다. 싹이 연둣빛으로 달린 무는 두엄자리 옆에 심어두면 자라서 꽃이 폈다. 장다리꽃이다. 등이 따끈하고 봄바람이 보랏빛과 분홍빛이 둥글게 빛의 고리가 나타나 연하고 연한 이파리들이 햇빛을 보는 순간 오는 것이다.

배추를 절여서 배춧속을 넣고 통에 담아 김치냉장고에 바로 넣었다. 언젠가 익어서 맛이 있으면 먹고, 김치찌개나 끓여보고 그래도 맛이 없으면 버리자 했다. 무는 비닐 같은 껍질을 모두 벗겨서 두툼하게 썰어 비닐봉지에 담아서 냉동실에 넣었다. 나중에 생선조림에 넣어 맛이 있으면 좋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우선 냉동실에 밀어 넣어두었다.

딸들이 오면 냉동실을 열어보는데 엄마 이거 다 버려야 되는 건데 왜 이리 많아, 먹지도 않으면서 넣어두기만 하면 어찌하면서 다음에 오면 다 버린다고 엄포를 놓았다. “안 돼, 다 쓸데가 있는 거란다”하고 “내 살림 관심 끄시고 니네들 냉장고나 잘 챙기시지요”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나이 들어봐라, 한 개라도 버리나. 힘들게 농사지어서 버리면 되겠냐 하는 게 내 마음이다.

남들은 싱싱하고 맛있는 것만 찾아 먹는데 나는 늘 시들고 상하기 직전의 채소를 먹게 된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 내버려두거나 미루고 미루다 시들시들하면 삶아서 또 냉동실로 간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냉동실이 미어터지게 된 것이다. 꺼내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다행인데 손님이 와도 외식을 하니 먹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주고 싶지만 누가 냉동실에 있는 것을 좋아할까 싶어 지금도 냉동실에서 꽁꽁 언 채 나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뒤섞여 이제는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다. 누군가 ‘냉장고 음식 파먹는다’라는 표현을 했다. 나도 이제 새 음식을 만들지 말고 쌓여있는 냉동실을 뒤져서 뭔가를 만들어 먹어 없애야 한다는 강박감에 냉장고를 열면 마음뿐 또 잊고 마는 것이다.

오늘 또 김치를 담갔으니 김치냉장고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 간신히 넣고 뚜껑을 닫았다. 배추 한 포기 담는 것도 힘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잔손이 많이 가는데 우수가 지났으니 또 봄채소가 지천일 텐데 묵은 김치를 먹고 싶진 않을 거 같다.

배추김치 한 포기 담고 지쳐서 커피 한잔 마시고 그때그때 음식을 조금씩 해먹자고 지키지 못할 결심을 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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