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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가 만든 길 위에서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내가 만든 길 위에서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2.12.0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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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내가 만든 길 위에서

어느 날, 찻잔을 닦다가 걸러냈지만 찻잔에 찻잎이 내 삶처럼 한 잎이 붙어있었다. 아, 말라버린 찻잎이 오그라들지 않고 쫙 펴져서 찻잔에 붙어있었다. 그렇구나, 나의 일상도 말라가면서 펴지고 오므라들고 하는구나. 차라리 오므라들면 펼 수도 있지만 펴져있는 것들은 마르면서 부서지면 나는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겁이 덜컹 나서 찻잔에 물을 붓고 달라붙은 찻잎을 불리면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보기로 한 것 같다. 

여행길, 전남의 잘 가꾸어진 차밭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초록이 내 몸에서 출렁거리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구불구불 언덕을 이루며 길게 이어진 차밭은 부드럽고 가는 가지 끝에 여리고 연한 빛의 잎들이 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밭을 이어주는 푸른 길을 따라 걸으며 차 맛보다 더 쓴 나의 시간들이 삭혀지고 있음을 느꼈었다. 무색의 물에 우러나는 차 빛을 체험장 찻잔에서 보았다. 그 색은 나의 지난날의 두려움과 미래의 안타까움이 찻물에 희석되어 나의 과거가 보이는 듯했다.

찻잔에 따끈한 물을 따르면 가느다란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 길은 향기롭고 쌉싸름하고 고통과 기쁨이 함께했다. 찻잔에 김이 올라오면 영락없이 나는 말라버린 찻잎을 떠올린다.    

한잔의 차를 마시기 위하여 수많은 손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맛을 내기 위하여 전통의 옛 차를 만들었으며 다도의 철저한 예법을 따라 손 움직임이었다. 다기(茶器)들도 중후한 멋을 풍기었고 다양함에 놀라기도 했다. 차 맛은 정성이 우러나서 같은 맛을 내지 않는 것 같다. 

차 맛도 모르면서 안방마님이 된 듯하고 우아한 몸짓이 부럽기까지 했으며 다도회를 기웃거리며 한참을 기다리다 얻어 마신 우리나라 차 맛이 이렇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윽한 향을 뿜어내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조금은 커피에 맛들인 내겐 부담이 가기도 한다. 강렬한 향기와 자극적인 맛이 미미해서다.

매일 다니던 길도 어느 때는 생소하게 여겨지고 홀린 듯 멍해져서 방향을 모를 때는 막막하고 당황하여 세상에 나 혼자 서있는 나를 본다. 이기적이고 집착이 부른 착각이 깊은 가을밤 갈 길을 잃고 낙엽 지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 같다. 내가 가야 할 멀고도 먼 길을 향하여 여전히 나만의 길을 내고 있는 것이다. 전통차를 만들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들이고 있는 장인들처럼 걷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이야기처럼 흐르듯 오가며 걷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찻잔의 찻잎과 차향같이 첫눈을 기다리며 눈길 위에 찍힌 내 발자국이 따뜻한 차 한잔에 녹아내리고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의 흔적을 올 겨울에도 남겨놓아야겠다.

술래잡기하듯 눈을 쓸어 길을 내고 으쓱거리며 동짓날 뜨거운 팥죽을 먹듯 온몸을 녹이며 마음 깊숙이 숨겨둔 내가 만든 길에 서서 뒤돌아보지 않는 길이 곧 내 길인 것이다. 길을 걷는 것이 차 한잔 우려내는 것이라 여기며 내가 만든 길 위에서 찬바람 불고 눈 오고 비가와도 나는 쉬지 않고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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