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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을비와 낙엽을 줍다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가을비와 낙엽을 줍다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2.11.2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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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가을비와 낙엽을 줍다

   

벼 그루터기에 모내기철처럼 새싹이 올라왔다. 처음 보았을 때 보리싹인 줄 알았다. 텅 비어있을 논을 생각하며 들로 나갔던 나는 벼 그루터기의 새싹을 누군가 줄을 맞추어 심었는지 알았다. 농촌에서 태어난 내가 이제야 가까이서 새싹을 보다니, 아니 무심히 보아서 처음인 줄 알았을 것이다. 보리잎과 비슷하고 연하고 푸른빛이 논을 가득 논물처럼 일렁였다.

며칠 전 장맛비 쏟아지듯 내린 가을비가 논에 고여 있어 봄인 듯 착각을 하였다. 죽은 듯 잘려있던 벼 그루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와 들판을 푸르게 물풀로 가득 채운 듯 싱그러웠다. 가로수와 야산의 나뭇잎은 건조한 바람에 날리며 각기 다른 색으로 손짓하듯 흔들렸다.

어릴 때는 우산을 쓰는 것이 너무 좋아서 비닐우산을 쓰고 논길을 걸으며 비닐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참을 논길을 따라 텅 빈 들판을 바라보며 돌아다녔다. 비닐우산의 빗소리와 드넓은 들판은 어린 마음을 꼬옥 안아주었다.

맑은 가을날이 계속 이어지던 어떤 날 갑자기 폭우처럼 가을비가 쏟아진 다음날 일찍 밖으로 나가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우산처럼 나무를 감싸던 나뭇잎은 나뭇가지를 내보이며 낙엽을 떨구고 밤새 내린 비에 젖어있었다. 나무를 올려다본 짧은 순간 나무아래 수북하게 쌓여있는 나뭇잎을 보았다. 비에 씻기어 깨끗하게 겹겹이 쌓여 낙엽은 모든 시간과 빛나던 순간이 떠올라 눈이 촉촉해졌다. 비와 함께했던 어두운 밤을 먼 미래를 그리며 모든 날을 떨구어냈다. 가슴에 부풀어 오르는 그 미묘하고 아름다운 낙엽의 모양은 사람의 습관처럼 차분하게 앉아있다는 생각으로 남았다.

가을이면 외롭다는 생각이 멀리 사라지고 나뭇잎이 너무 예뻐 물방울이 채 마르지 않은 낙엽을 줍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예쁘다고 감탄하였다. 노란 은행잎, 빨강 단풍잎, 아직 쓸어내지 않은 그대로인 아스팔트 위를 낙엽은 물을 들이고 있다. 얼비치며 퍼져나가는 가을빛,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을 비춰주었다. 자신의 색을 지닌 낙엽은 자기의 색을 간직하고 불만이나 불평이 없다. 낙엽 위를 밟고 지나간 빗발 자국은 아래로 흘러가고 나는 빗물들과 함께 예쁜 나뭇잎을 주웠다. 햇볕 고운 날 빗물을 닦아내고 말려서 책갈피에 끼워 추억을 담아놓을 것이다.

한참을 걸어가며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젊음을 수놓은 듯 나무를 감싸며 쌓여있다. 길을 걷는 것이 싫은 나는 먼 길을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투명하고 숨김없이 온몸을 내보이는 낙엽이 지난날 나의 배경이 되고 추억이 되어 잊혀진 사람과 기억하는 사람,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이 차곡차곡 나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다. 모든 이의 아픔이 슬픔이 이렇듯 빛을 내며 소멸해가길 바라며 단풍의 아름다움을 빛나게 해준 가을비와 함께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두 손 가득 담아본다. 벌써 가을은 가버렸다고 서운해 하며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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