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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노영희 시인 '사랑을 엮는 뜨개질'

[수필] 노영희 시인 '사랑을 엮는 뜨개질'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2.10.19 14:38
  • 수정 2022.10.1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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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경기도민일보 미디어]  날마다 가파르게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 가을을 맞이할 준비도 할 사이 없이 여기저기서 파란 잎들이 춥다고 따뜻한 옷을 입혀달라고 어머니의 하얀 머리에 세월이 내려앉듯 가을의 색깔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 그때 나뭇잎 하나가 내 발등 위로 날아와 앉았다.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가 생각난다. 아파트 앞에 상가가 있었는데 상가보다는 주인께서 농사를 지으시는지 철 따라 고추며 도토리 건물 옆에 심어진 대추나 밤 등을 항상 가을이면 널어놓으시고 옆에 앉아서 고추 꼭지를 따고 계시던가 아니면 채소를 다듬고 계셨다. 지나치다가 다가가서 농사를 지으시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시며 힘들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옆에는 커다란 고양이 두 마리가 두 다리를 쭉 펴고 누워서 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서는데 내 모습이 창문에 비쳤다. 속으로 어머나 깜짝이야 놀라서 자세히 보니 쇼윈도였다. 할아버지 장사하시나 봐요 하니 할아버지께서는 털실로 옷을 짜서 팔았는데 이제 힘들어서 못 하신다고 하셨다. 커다란 창 앞으로 가서 들여다보니 아주 여러 가지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걸려있었는지 색이 바래고 늘어지고 먼지가 끼었는지 우중충하고 또 전등을 켜지 않아서 옷 모양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오랫동안 하셨나 봐요, 종류가 많네요 하며 다시 유리창을 손으로 닦고는 또 들여다보았다. 모자, 조끼, 카디건, 두껍게 짠 코트도 있었다. 다양하고 많은 물건이 걸려있고 그 뒤로 털실들이 쌓여 있었다.

그 후로 털실이 어른거리고 한번 뜨개질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릴 때 동네 언니들에게 배운 뜨개질이 생각났다. 나는 언니와 나이 차이가 커서 언니 친구들이 엄마 같았다. 뭐든 물어보거나 가르쳐 달라고 하면 엄마보다 더 잘 가르쳐주었다. 뜨개질하고 싶다고 하니 비닐우산 손잡이를 잘라서 뜨개바늘을 만들어주고 언니들이 실을 나눠주면서 코 잡는 방법부터 가르쳐주었다. 저녁이면 우리 집에 모여서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냈다. 코를 빠뜨려서 모양이 안 나면 언니들이 다시 풀어서 뜨개질을 뜨게 해주었다. 언니들은 스웨터를 떠서 입기도 하고 목도리도 예쁘게 떠서 모양 있게 목에 두르고 다녔다. 그 당시 유행하는 색의 털실로 만든 옷은 참 예쁘고 포근포근하고 따뜻했다. 겨울방학 동안 배운 털실 장갑을 끼고 학교에 갔을 때의 기분은 마냥 자랑스러웠다. 잘하는 것 없는 내가 수도 없이 풀렀다 떴다를 반복하여 만든 장갑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엄마가 떠준 예쁜 스웨터를 입고 왔어도 내 장갑보다 예쁘지 않았다. 춥고도 긴 겨울을 언니들과 장난도 치고 웃으며 뜨개질하면 어느새 봄이 와 새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딸 방을 치워주다가 커다란 비닐봉지가 침대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놓은 것을 보았다. 봉지를 열어보니 털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너무 의아해서 저녁에 퇴근한 딸에게 털실은 뭐하려고 샀느냐 물어보았다. 털실이 너무 예뻐서 샀다는 것이다. 저러다 다 버릴 거면서 왜 샀냐고 핀잔을 주었다. 딸은 거실로 털실을 가지고 나와서 쏟아놓았다. 무지개색이 온 집안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털실에는 아주 곱고 가는 털이 붙어 있었는데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무리 보아도 옷을 만드는 실 같지는 않았다.

딸은 행주 수세미 뜨개질을 배워서 친한 친구,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물하려고 한다고 했다. 샘플 책자를 보니 다양한 모양과 색깔이라 당장이라도 뜨개질하고 싶었다. 계란, 사과, 꽃, 무지개떡 등 다양했다. 생각은 이뻤지만 이걸 언제 뜰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까칠까칠 하지만 눈에 띄게 화려하고 예쁜 털실은 가을 단풍의 색깔 같았다. 딸이 행주 수세미를 예쁘게 떠서 선물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씨실과 날실이 엮어져 사랑과 정성이 배어든 딸만이 뜨개질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행주 수세미를 빨리 선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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