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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安否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 安否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2.10.04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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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安否

아침이면 햇볕은 나에게로 온다. 처음 너를 본 순간처럼 불덩이가 되어 온다. 밤새워 뒤척이며 생각한 어지러움도 햇볕은 모두 말려버린다. 아직은 가을이 초록 잎을 달고 있지만 들의 벼들은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몇 년 전 감나무 22개를 심었다. 2개는 원인도 모르게 죽었다. 어릴 때 우리 동네는 배나무 밭이 많았고 감나무는 못 보았다. 바람에 약한 감나무는 죽거나 자라지를 못했다. 빈 밭에 뭔가를 길러야 했다. 생각하다가 동네 어르신들께서 감나무가 잘 자란다고 하여 심은 것이다.

문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일 년에 한번 가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식구들이 첫째는 관심도 없고 나만 안절부절 감나무 생각만 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태풍이 분다던가 비가 많이 온다는 뉴스다. 

간신히 가을에 감나무 밭을 가면 풀 속에서 환한 감을 달고 아주 힘겹게 나를 바라보았다. 가는 가지에 커다란 감을 주렁주렁 달고 쓰러질 듯 서 있다가 나를 보면 나뭇잎을 떨구었다. 미안한 마음이 감보다 더 무거웠다.

아, 날마다 내 귀가 가렵고 재채기가 나는 것은 감나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나 꽃을 피웠어요. 풀이 나를 칭칭 감아서 숨을 못 쉬겠어요. 감이 너무 커서 가지가 꺾어질 거 같아요. 목이 말라요 하고 애절하게 나를 부르는 감나무의 숨결이었던 것이다. 안개가 끼고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고 까치가 맛있는 홍시를 파먹어도 나는 그걸 막지 못한다.

시간이 날 때란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은 나의 신뢰와 믿음을 조금이라도 감싸기 위한 위선의 말일지 모른다. 거절의 냉정함을 내비치기 싫고 혹시 시간이 나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나의 최소한의 방패이다. 하지만 시간 날 때는 나는 매번 핑계가 필요했고 스스로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하였다. 아무리 멀어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열정의 사랑이었다면 이렇게 나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감나무를 소홀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걸어서라도, 기차를 타고, 택시를,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리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아파트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고 커다란 감을 주렁주렁 달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바람에게 보란 듯 과시하는 감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올해도 못 가는구나. 내 자식처럼 생각한다면서 감을 따러 못 간다는 건 나와 감나무와의 약속을 저버린,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아픈 손가락의 감나무였다는 걸 잊는 시간이 날 때였다.

늘 사람이 고픈 감나무들에게 언제 가서 가지도치고 거름도 주고 풀을 잘라줄 수 있을까. 사랑을 많이 받고 햇볕 속에서 투명해져가는 아파트 감나무의 당당함 앞에서 나는 또 미안함과 속상함으로 안부를 전한다. 올 여름 어떻게 지냈는지, 태풍은 잘 피해 갔는지.

한 개의 감을 가지에 달고 나를 기다렸던 첫 감동을, 너의 모습을 오늘도 잊지 못하고 가슴만 끓어올라 꿈속에서 거름을 주고, 물길을 내주고, 까치밥을 남기고 네가 내게 준 감을 끌어안고 오는 꿈이라도 꾸고 싶다. 하얗게 감꽃이 핀 것을 보지 못했어도, 산처럼 억새풀이 감나무를 가리고 있어도 가지 끝에 몇 개의 감을 달고 나를 기다릴 것이다. 올해는 꼭 가서 풀을 잘라주고 돌아올 때 “또 보자”하고 감나무를 끌어안아주고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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