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수필] 명절과 만두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명절과 만두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미디어
  • 입력 2024.02.06 12:15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명절과 만두

할일 없이 바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정작 저녁 잠들기 전 오늘은 무엇을 하였나 생각해보면 특별히 다른 날과 다름없는 똑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입에서는 바쁘다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어제가 입춘이었고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으니 봄비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어제 하루 종일 허리가 휘도록 만두를 만들었다. 냉장고의 김치는 벌써 맛이 없어지고 먹지도 않는 김치가 김치냉장고를 점령하여 하나 가득 채워져 있다.

만약 김치통을 열었을 때 싱싱함이 사라진 하얗게 곰팡이가 살짝 끼어 있으면 어찌해야 하는지 겁이 나기도 했다. 큰 결심을 하고 김치냉장고를 정리하기로 했다. 성애가 냉장고 가장자리를 얼음처럼 붙어있고 적막감의 어둠에 빛을 갑자기 받아 눈이 부신 냉장고의 음식통들이 봄인 줄 알고 꽃을 피우는 꽃나무 같았다.

허리가 안 좋아 약물치료를 받고는 조심조심해야 함에도 마음에 봄바람이 휘몰아치며 나를 들어 올리고 날아가는 꽃잎으로 가벼워진 느낌이 왔다. 나도 놀랄 정도로 무거운 김치냉장고의 묵은 김치통들을 들어내었다.

베란다에 쌓인 통들을 하나하나 열어 분리하고 김치를 모두 한 곳으로 모아놓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김치통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먹을 만했다. 이걸 어떤 반찬을 만들지, 아니면 다시 김치냉장고로 다시 들여놓을지 한참을 갈등하였다.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맛은 없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어른이 되지 않았다면, 세월이 멈추었다면 J.D.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학교생활과 일탈을 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를 원했을 때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은 등을 밀지 않아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홀든’의 용감성에 웃음을 참지 못했던 그때처럼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일들을 누구의 강요도 간섭도 받지 않는 지금, 저 많은 김치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힘이 들었던 김장김치 아닌가. 그 기억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했다.

싱싱한 김치 한 통만을 다시 넣어두고 모든 김치를 커다란 소쿠리에 쏟아 담았다. 물기가 빠진 김장김치를 보며 누워 있으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며칠 있으면 명절인데 만두를 만들어 나눠주자 생각을 하니 힘이 솟아났다. 떡국에 만두를 넣어 끓인 떡만둣국만 있어도 명절 상차림엔 손색이 없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허리는 아프고 만두를 빚다보니 싫증도 났다. 빨리빨리 만들어 만두 만들기를 끝내고 싶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만두를 만드는 속도는 한여름 뜨거운 바람에 지쳐가는 식물 같았다.

만두피에 나의 꿈과 지난날의 기쁨과 즐거움만을 꼭꼭 담았다. 찜통에 김이 올라오면 꺼내어 소쿠리에 담았다. 맛을 볼 새도 없이 빠르게 만든 만두는 윤기를 내며 소쿠리 위에 겨울 입김의 새하얀 일상이 가볍게 쌓아 올려졌다.

만두를 만드는데 꼬박 하루가 지나갔다. 어릴 때의 단짝처럼 붙어버린 만두를 떼어내며 식히는 손길은 일상의 결과물처럼 나의 존재감을 바라볼 수 있었다.

봄비 내리는 오늘 머릿속은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제법 많은 만두를 여러 개의 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맛이 없다 해도 “맛있게 먹었다”는 정겨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봄비가 내리는 거리를 한 손엔 우산을 쓰고 한 손엔 만두 봉투를 들고 마음엔 이른 봄을 담고 집을 나섰다.

 

 

저작권자 © 경기도민일보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