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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연애편지(Love Letter)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수필] 연애편지(Love Letter)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미디어
  • 입력 2024.01.3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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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
노영희(시인)서정여성문인회 회장

 

연애편지(Love Letter)

고독의 의자에 앉아서 세상을 본다면 최고의 시간이 무엇인지, 최악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사춘기의 가슴에는 고독이라는 존재가 빛 속에 떠올라 떠돌고 그러다 추락은 행복이 되었다. 어설픈 모든 지식과 억지스러움의 문장들이 지면에 한 자 한 자 옮겨질 때 진실과 거짓은 교차한다. 하염없이 생각나고 떠오르고 후회스럽다가 피식 웃음이 번질 때 정답이 없는 그저 과거로 떠밀려갈 뿐이라고, 그래도 희망의 봄은 늘 다가오고 기다려졌다.

초등학교 때 작은 오빠는 분홍빛 편지를 주면서 내 친구 언니에게 갖다 주라는 것이었다. 내 손에 쥐여 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문을 열고 싫다고 방바닥에 놓았다. 성난 얼굴로 내 팔을 잡아당겨 다시 그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듯 넣고는 등을 밀었다.

찔끔찔끔 울면서 친구네 집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논둑의 길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개울을 건너고 한참을 걸어야 친구 집이었다. 삭풍이란 말을 아시는지 몰라도 바람이 거칠게 불 때마다 눈이 흩날리며 얼굴 정면으로 날아왔다. 길은 고르지 못하고 개울을 건널 때는 너무 추워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친구의 집 대문 앞에서 친구를 불렀지만 나오지를 않았다. 한참을 벌벌 떨면서 마지막으로 불러보자 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아, 그런데 친구가 아닌 친구 언니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때의 당혹함은 발이 시려 동동거리는 것보다 더 춥고 가슴이 시렸다. 나는 할 말을 잃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편지를 내밀었다. 그 언니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거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며 쌀쌀맞게 말하며 들어가 버렸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학년이 높아지면서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모두 어떻게 편지를 쓰는지 모르는 것을 아시는지 담임선생님께서 칠판에 편지를 써주셨다. 모두는 똑같이 써서 편지봉투에 넣고 풀칠을 해서 교탁에 모두 올려놓았다. 편지를 쓰는 부담감이나 설렘이나 답장을 기다리는, 편지라는 매개체의 의미는 아예 없었다. 편지를 썼다는 가벼운 마음뿐이었고 떠들고 뛰놀며 편지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개학을 하고 친구가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잊어버렸던 그날이 슬그머니 생각이 났다. 오빠 갖다 주라고 하고 가버렸다. 그때 친구 언니의 쌀쌀했던 표정이 보였고 그날 집으로 들어가서 대청마루에 놓고 뛰어나왔던 생각도 났다.

그 후로도 오빠는 몇 번이나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했다. 직접 주라고, 왜 나를 시키느냐고 따졌다. 그래도 집요하게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었다. 같은 언니면 나는 모른 척하며 어떻게든 전해 주었을 텐데, 아마 내 친구 언니들 거의에게 보냈던 것 같다. 만약 어른들께 들키면 호되게 야단을 맞을 것이 뻔한 시절이었다.

귀찮던 오빠가 군대에 갔다. 나는 수도승처럼 머리를 밀고 온 오빠를 보며 이별 아쉬움의 가족애보다는 속이 시원했다. 참견하고, 시키고 자기 멋대로인 오빠가 집에 없다는 것에 자유를 느꼈다.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물어보았다. 도대체 오빠는 어떤 언니들이 맘에 드는지 말을 해달라고 했다. 머뭇거리더니 오드리 헵번, 소피아 로렌 같은 분위기의 여자라며 꼭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꿈도 크셔라.”

나도 오빠의 사춘기 나이가 되어 위문편지를 보내다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오빠가 있었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썼고 그 오빠도 의무감으로 답장을 쓴 것 같은 분위기의 편지였다.

그 오빠가 제대했고 처음으로 만났다. 그런데 낯설음도 없고 동네 오빠나 친구 오빠 같은 친숙한 느낌의 오빠였다.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하였지만 그날 나는 갑자기 집안일이 생겨서 나가지를 못하였다. 너무 안타까웠다. 좋은 사람 같았고 서먹함이 없었는데,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내 청춘의 연애사는 허무하게도 스토리 없이 끝나버렸다.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글로 대화하는 옛날의 연애편지는 아련하고 가끔씩 생각나서 추위도 잊고 얼굴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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