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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쌀밥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수필] 쌀밥 /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미디어
  • 입력 2023.11.29 11:49
  • 수정 2023.11.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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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쌀밥

텅 빈 들길을 걷는 것도 낭만이 된 것 같다. 동네 농토의 면적이 줄어들면서 들길이 많이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서고 산업단지화로 공장이 들어서면서다. 아직도 추수철이면 벼 이삭에 메뚜기가 가끔 보이긴 하지만 예전의 메뚜기가 아닌 듯하다. 메뚜기도 도시화한 논에서 살기가 힘든지 어디론가 가버렸다.

철새들도 서둘러 떠났는지 적막감이 깔려있다. 모든 것은 어떤 변화를 따라서 가고오고 차가운 바람이 들판을 지키고 있다. 

추수를 끝내고 첫 수확인 햅쌀로 쌀밥을 지었다. 무쇠솥은 아니지만 전기밥솥도 밥맛이 좋다. 햅쌀밥맛이 그리웠던 만큼 얼른 밥솥을 열고 김이 빠진 후 밥을 푸기 전 송송 구멍이 난 밥의 표면은 윤기가 흘렀다. 입맛을 되찾는 햅쌀밥의 뽀얀 냄새, 논바닥에서 고향에 두고 온 목소리들이 풀려나오면 하얀 쌀밥을 훌훌 섞어서 밥그릇에 퍼 담는다.

며칠 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밥심에 살아오던 나였기에 외국에서도 밥만을 찾아 먹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많아 김밥을 비롯하여 볶음밥, 쌀죽 등 외국이라고 생각이 안들 정도로 우리나라 음식들이 많았다. 쌀밥도 고슬고슬하고 끈기가 있어 내가 지은 밥보다 맛있었다.

어릴 때의 기억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쌀밥이지만 나는 너무 귀하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쌀밥이다. 그 잊혀지지 않은 밥 냄새만으로도 포만감을 느낀다.

부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밥을 짓던 엄마와 언니의 고생을 난 모르고 자랐다. 당연히 밥상이 차려지면 먹고 학교 가고 집에 오면 차려진 밥을 먹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밥을 하고 김치를 담그고 하다보면 엄마와 언니의 손바닥은 늘 빨갛게 부풀어있거나 물에 불어있었다. 나는 엄마와 언니들은 손이 거칠고 주름지는 줄 알았다. 그 힘든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아무에게도 고생한다는 소리를 못 듣고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한 것이다. 

언젠가 엄마는 엄지손가락에 검은 물감 같은 것이 묻어있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면사무소에서 지문을 찍고 오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문이 없어서 다시 가셔서 지문을 찍어야 한다고 하시며 엄지손가락을 정성들여 닦으셨다. 지문이 닳아서 없어진 것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준비를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지문인식기에서 엄지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삐 하는 소리가 났다. 다시 엄지손가락을 올렸는데도 또 삐 하는 소리가 났다. 공항 직원이 다시 나오라고 손짓하였다. 무슨 일인가하고 물었더니 지문인식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요즘같이 모든 일은 전자제품이 다해주고 손으로 빨래를 하지도 않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직원은 한번만 더 해보라고 했다. 간신히 지문인식이 되어 출구를 나갔다. 관광을 끝내고 돌아오는데 또 지문인식이 안되었다. 이번에는 직원이 안내해서 여권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나올 수 있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출구로 나가는데 나만 남아서 여권을 확인하고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본인인지 확인하는데 나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죄인 같은 생각이 들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나도 우리 엄마처럼 지문이 닳아 없어진 것이 아닌가 서글퍼졌다. 두 손을 펴서 손바닥을 자세히 보았다. 손금도 지문도 내 눈에는 보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문 이야기를 했다. 모두는 “무슨 일을 그리 많이 해서 지문이 닳았을까”하며 핀잔을 했다. 절대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고 다른 이유일 거라는 것이다. “그래, 열심히 산 증거일 거야.” 

손이 퉁퉁 불고 허리도 펴지 못하면서 농사지어 쌀밥을 자식에게 먹이셨던 부모님이 아주 멀리서 별빛처럼 손을 흔들어주시는 것이었다. 새벽별이 맑은 서쪽 하늘에서 선명하게 내 이름도 불러주었다. 영이야 하고.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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