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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콩깍지/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수필] 콩깍지/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 기자명 경기도민일보
  • 입력 2023.09.2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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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노영희(시인) 서정여성문인회 회장 화성시 은빛독서나눔이

 

콩깍지

집으로 오는 길에 동네 분을 만났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바삐 오는데 뒤에서 급하게 따라오시면서 검정 봉투를 손에 쥐여 주셨다. “집에 가서 열어봐”하시면서 뒤돌아 가셨다.

식탁 위에 올려둔 검정 봉투를 열어보았다. 시골 고향 냄새가 코로 달려왔다. 풋풋하고 상큼한 풋콩이었다. 콩대와 콩잎도 싱싱했다. 아주 급하게 꺾어 담은 모양새가 엿보였다. 그렇지, 농사지으면서 차분히 일하시는 분이 얼마나 계실까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감상적인 생각도 잠시, 고민이 밀려왔다. 나의 몸은 여름이 되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다. 가야 할 곳도 많아지고 농사일도 해야 하니 나의 손톱은 얇아지고 손톱 밑은 진한 포돗빛으로 가득 채워진다. 일에 묻혀 사는 것도 아닌데 엄살이라고 하겠지만 이젠 체력이 달려 손자녀 잠시 보아주는 것도 힘들고 집안일하는 것도 벅차서 누에가 잠을 자듯 길게 누워 자고만 싶다. 몸도 마음도 약해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고 굼뜨다. 

콩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언제 까서 밥을 지어 먹을까.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은데 어떡하면 좋을까. 콩 향기는 그새 온 집을 돌아다니고 있다. 내 마음은 콩밭에 와있지만 몸은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콩을 주신 그분이셨다. “몸이 안 좋아 밭에 가면 안 되는데 그래도 밭이 궁금해서 갔더니 콩이 자라서 영희씨 주려고 꺾어왔다”고 하셨다. 그러셨구나. 아, 어떡하나. “영희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온 힘을 다해서 콩을 까기 시작했다. 한 개의 콩을 깔 때마다 더욱 짙어지는 풋콩의 향기가 지친 내 몸을 일으켜 세우는 듯했다. 한 개 한 개 까다보니 힘든 줄 모르게 다 깠다. 파랗고 동그란 콩들이 빤히 나를 바라보며 수고했다고 토닥여주었다. 콩 씨를 고를 때의 인내력이 내 몸 곳곳에서 살아있었나 보다. 

콩대와 콩잎과 콩깍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소가 생각나고 뜻밖의 인연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나는 소를 무척 좋아했다. 온종일 우물우물 뭔가를 씹으며 침을 흘리고 서있는 소는 착하고 착한 나의 친구로 여겼다. 무엇이든 생기면 소한테 주었다. 어른들이 먹이로 주는 것을 살펴보고 그대로 소에게 주었다. 되새김질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배가 고파서 우물우물 뭔가를 먹고 있는 줄 알았다. 가엾기도 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 고구마 줄기나 지금 식탁 위에 놓여있는 파란 콩깍지를 갖다 주었다. 그러면 ‘음매’하며 달려와 숨을 내쉬며 맛있게 먹었다. 그때 살짝 소를 쓰다듬어 주었다. 껄끄러운 소털이 내 손길이 닿으면 옆으로 누웠다. 다 먹을 때까지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콩깍지가 내 눈에 씌워지기 시작한 것 같다. 무엇이든 좋아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콩깍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하루 세 시간씩 인문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나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모든 일이 시들시들 의욕이 없었는데 인문학 강의는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어렵고 긴 시간을 잘 버텼다. 그 많은 강의 도서목록은 나를 주눅 들게 했으며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게 해주었다. 무심히 지나치며 읽었던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셨던 역사, 철학, 문학, 과거 사람들이 살았던 나와의 다른 삶, 경험과 체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해주신 교수님과의 만남이다. 

영상에서만 보아왔던 교수님을 종강에서 직접 뵙게 되었다. 수강생 모두는 “와”하고 손뼉을 치거나 일어나거나 “어머머”하고 입을 가렸다. 놀라웠다. 그렇게 강건해 보이고 철저하고 완벽한 수업을 하시던 교수님은 여리디여린 긴 머리의 귀엽고 예쁜 소녀였다. 드디어 마스크를 벗으시며 첫인사를 하셨다. 그동안 보아왔던 교수님의 모든 것이 반전되는 시간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잠재우며 수업은 끝을 맺었다.

그 후로 우리 수강생들과의 안부와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다정하고 어여쁘신 교수님에게 콩밥을 맛있게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은 내 두 눈에 두껍게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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