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카멜리아 가지가 있는 자화상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카멜리아 가지가 있는 자화상
  • 해설자 진채문 교수
  • 승인 2019.03.1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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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그림들 나치 파괴에도 살아남아

獨 역사 속의 여성 우표 발행 

[경기도민일보=해설자 진채문 교수] 격변의 19세기가 저물어가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화가로서 세 점의 걸작을 남기고 자신의 아이를 갖겠다는 좀 특이한 인생의 목표를 가졌던 파울라 모더존 베커(Paula Modersohn Becker, 1876~1907)라는 독일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마틸데 베커(Mathilde Becker)는 폰 뷜칭슬롸벤이라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25세 때 그녀는 그런 인생의 목표에 걸맞게 그녀보다 11살 연상의 당시 잘 나갔던 화가 모더존 오토(Modersohn Otto)와 결혼한다. 그녀의 이름 모더존은 그녀의 남편의 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꽃나무 앞 자화상 Self portrait in front of flowering trees(1902).
꽃나무 앞 자화상 Self portrait in front of flowering trees(1902).
무릎 꿇고 젖을 먹이는 엄마 Kneeling breast feeding mother(제작연도 미상). 
무릎 꿇고 젖을 먹이는 엄마 Kneeling breast feeding mother(제작연도 미상). 

그러나 당시 보수적이었던 독일 미술계에서 화가는 남자들만의 직업이었고 그녀가 직업화가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당시로써는 모던하게 여겨졌던 세잔, 고갱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자리를 잡고 마티스처럼 아방가드한 화풍이 시작되던 파리와는 달리 보수적인 독일 화단은 아직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중시하는 아카데미즘 또는 사실주의 화풍만이 인정되었고 아방가드한 그림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같은 모더니즘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정확한 묘사는 거부하고 형태를 단순하게 처리하는 대신 자신의 감성을 화폭에 담아 아방가드한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아이를 몹시 갖고 싶었던 그녀는 엄마와 아기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들을 남편 모더존 오토의 어린 딸이 장난삼아 그린 것으로 오해하거나 그녀를 사람의 입이 수저처럼 그려진 괴상한 괴물 같은 사람 그림을 그리는 고집 센 이상한 여자로 여겼다. 결혼 전 그런 그림을 본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화가가 될 재능이 없다며 결혼을 하거나 교사가 되라고 종용했었다.

상처 후 딸이 하나 있었던 남편이 임신이나 출산에 의해 그녀도 잃을까 두려워 그녀와의 잠자리를 회피하면서 그녀가 바라던 아이를 갖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그녀는 결국 2년 정도 지속되었던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남편을 떠나 그녀의 어릴 적부터 친구인 조각가 클라라 릴케(Clara Westhoff Rilke)가 있던 파리로 가 그곳에서 활동한다. 

클라라 릴케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부인으로 그녀는 그들 부부와 친분이 두터웠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상화 Portrait of Rainer Maria Rilke(1906).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상화 Portrait of Rainer Maria Rilke(1906). 

그녀의 나이가 서른이 되었을 무렵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화해한 그녀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결국 바라던 대로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자라는 카멜리아 가지(Camellia Branch)를 그렸다. 이 나뭇가지는 그토록 바랐던 뱃속의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그녀의 간절함의 표현이기도 하고 이제는 성인이 되어 엄마가 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고갱의 영향이 짙게 드러나는 이 그림 속 그녀의 행복한 표정에 자신에 대한 자랑과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가 잘 나타나 있다. 

카멜리아 가지가 있는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a Camellia Branch(Die Malerin mit Kamelienzweig), 1906~1907. 
카멜리아 가지가 있는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a Camellia Branch(Die Malerin mit Kamelienzweig), 1906~1907. 

그녀는 31세 때 그토록 원했던 딸을 낳고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라 마틸데(Mathilde)라는 이름을 지어주지만 출산 후 18일 만에 산후색전증(postpartum embolism)이란 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출산 직후 파울라 모더존 베커와 딸 마틸데, 1907. 
출산 직후 파울라 모더존 베커와 딸 마틸데, 1907. 
누워있는 엄마와 아이 Reclining Mother and Child, 1906.
누워있는 엄마와 아이 Reclining Mother and Child, 1906.

시대를 앞서갔던 그녀는 미술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그렸다. 사실 17세기 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1 또는 1653)라는 여류화가가 모델을 쓰지 않고 자신의 몸을 참고하여 누드를 그렸고 그 후에도 여러 여류화가가 있었지만 모더존 베커 이전에 아무도 누드로 자화상을 그리진 않았다. 

자화상(상반신 누드) self potrait(semi-nude), 1906. 
자화상(상반신 누드) self potrait(semi-nude), 1906. 

그녀는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750점에 이르는 그림과 1000여점의 스케치를 남겼지만 생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다.

그러다 그녀가 죽고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와 키르크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같은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일기와 편지 글들과 함께 그녀의 그림도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아방가드한 그녀의 그림들이 독일의 모더니즘, 특히 독일 표현주의의 시작점으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기이하게만 여겨졌던 가면처럼 그려진 그녀의 초상화 얼굴들은 이후에 그려진 키르크너나 모딜리아니 같은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산업혁명 후 세기말 분위기 속에 모더니즘 화가들은 원시주의(primitivism)을 표방하며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순수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고갱은 물질주의에 찌든 복잡한 도시를 떠나 남태평양 타히티섬에 살면서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모습을 그렸다. 그의 뒤를 이어 키르크너나 모딜리아니 같은 주로 표현주의 화가들은 아프리카나 태평양섬의 원주민들의 가면이나 얼굴 조각상의 모습을 빌어 인물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녀의 많은 그림들은 1927년 그녀의 지인 루드비히 로젤리우스(Ludwig Roselius)가 그녀의 이름을 따 지은 고향 브레멘의 파울라 모더존 베커 미술관에 전시 보관됐다. 키르크너를 비롯한 여러 독일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많은 작품들이 나치에 의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압수되고 파괴되었지만 그녀의 그림들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살아남았다. 

그녀의 딸 마틸데는 후에 파울라 모더존 베커 재단 Paula Modersohn-Becker-Stiftung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1996년 독일 정부는 ‘독일 역사 속의 여성(Women in German history)’이라는 우표 시리즈에 그녀의 자화상을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1996년도 발행 독일 우표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자화상 Stamp from Deutsche Post AG, 1996, Self-portrait of Paula Modersohn-Becker. 
1996년도 발행 독일 우표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자화상 Stamp from Deutsche Post AG, 1996, Self-portrait of Paula Modersohn-Becker. 

 

경기도민일보, KG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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