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 최희서 일본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실감나는 연기...가네코 후미코 여사 92년 만에 독립유공자!
영화 박열, 최희서 일본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실감나는 연기...가네코 후미코 여사 92년 만에 독립유공자!
  • 박종철 기자
  • 승인 2018.11.19 0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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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민일보 = 박종철 기자] 

영화 '박열;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박열'은 2017년에 개봉한 영화로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열과 그의 애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가네코 후미코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최근  9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더욱흥미를 끌고 있다.

일본 도쿄의 인력거꾼으로 일하며 핍박 속에 살아가던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이제훈)은 다른 조선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사회주의 오뎅집'이라는 아지트에서 폭탄테러 투쟁 계획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잡지에 게재된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감명받은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그를 직접 찾아가 같이 동거하며 투쟁하자는 제안을 하고, 둘은 동거 계약을 맺게 된다.

1923년 9월 1일, 간토 전역을 뒤흔드는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자 사회가 혼란해지고, 일본 내각은 이후 퍼진 괴소문 등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조선인의 폭동 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조선인 6000여 명이 학살된다.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태에 이르자,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는 조선인 불령선인을 잡아들여 사태를 정당화하려 한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내각은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박열과 후미코는 형무소로 연행되어 검사의 취조를 받다가 폭탄 입수 계획이 발각되자, 이를 두고 히로히토 황태자에게 폭탄을 날리려 했다고 고의로 자백한다. 반역죄로 기소된 두 사람은 황당한 조건을 내세우며 당당한 태도로 재판에 임하게 되는데..

영화의 주인공이자 영화 타이틀이기도 한 박열 역에는 이제훈이 맡았다. 이준익 감독은 "이제훈이라는 배우로서의 긴장의 떨림이 박열이 갖고 있는 뜨거움과 통한다"는 평을 낸 바 있다.

박열 역으로 이제훈을 추천한 것은 최희서로, "날카로운 눈빛이 박열의 이미지와 겹쳐서"라고 한다. 박열의 동지이자 애인인 가네코 후미코 역에는 최희서가 캐스팅되었다.

최희서는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서도 출연한 적이 있으며, 주연으로는 이번 영화가 처음이다. 최희서가 주연으로 발탁된 이유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과 더불어 남다른 연기력으로, "가네코 후미코라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여배우는 최희서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 이준익 감독의 설명이다.

실제 최희서는 실감나는 연기로 그녀를 잘 몰랐던 관객들은 진짜 일본인으로 착각했다.

작중 조선인 폭동과 박열사건을 조작하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에는 재일교포 3세 배우인 김인우가 캐스팅되었으며, 일본인 배우도 여럿 캐스팅되었다. 특히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는 극단 '신주쿠양산박' 단원이 다수 출연했으며, 대표 김수진은 작중 박열과 후미코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 역을 맡았다.

이작품의 영향일까 일본인 여성 혁명가이자 박열 의사의 부인으로, 일왕 암살을 계획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여사는 9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17일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가네코 여사 등 여성 32명을 포함해 모두 128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추서한다고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1903년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출생해 고모의 양녀로 들어가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서 약 7년 동안 학대를 당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인들의 독립의지에 크게 감명 받은 뒤 그 해 일본으로 돌아가 여러 사상가들과 교우해 아나키스트가 됐으며 1922년 3월 도쿄에서 박열을 만난 뒤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필명 박문자(朴文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했다.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을 도와 의열단(義烈團)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했지만 체포돼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1926년 7월 23일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민일보, KG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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